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즈먼드 투투 (문단 편집) === 백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 [[1976년]] 6월, 투투가 포르스터 대통령에게 경고한지 두달만에 사건이 터졌다. 남아공 정부는 반투 교육부에서 제의되었던 [[아프리칸스어]] 강요법안을 통과시켰고 자신들이 백인들과 뒤질 것이 없다면서 세력을 불리고 있던 흑인 젊은이들이 격분하여 이에 맞서게 된 것이다. 1976년 [[6월 16일]] 소웨토에서 흑인 학생들은 아프리칸스어 강요에 맞선 평화시위를 벌였다. 급격히 수가 불어난 그들은 올랜도 중학교에 모여 농성을 벌였는데 경찰들이 경고없이 발포하여 헥토르 페터슨이라는 12세의 소년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보물찾기 시리즈]] 남아공편과 [[이현세]]의 세계사 넓게 보기 아프리카편에서도 언급이 되어 있다.] 흑인 사회 전체가 뒤집혔고 청년들을 중심으로 흑인들은 전국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수백명이 넘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봉기는 몇달간 지속되었고 수천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비록 인종 차별 정책 철폐에는 실패했지만 백인정권은 크게 놀라 흑인들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강경정책으로 나서게 되었다. 군인과 경찰들이 비무장 시위대와 학생들에게 총을 쏘고 개를 풀고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는 장면은 전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세계의 여론은 크게 나빠졌다. 이런 절묘한 타이밍에 투투는 레소토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남아공을 떠나야만 했다. 그때 [[넬슨 만델라]]와 더불어 흑인 운동의 핵심 지도자였던 스티브 비코가 30살의 나이로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그가 고문과 구타로 사망했단 사실이 알려지자 흑인 사회는 다시 한번 들끓었다. 그 소식을 들은 투투 역시 크게 상심하였는데, 투투는 인종차별이 흑인 뿐만 아니라 백인에게도 피해를 준다는 주장을 했다. 흑인 차별은 장기적으로 백인들의 인간성에게 손상을 주고 백인들에게 손해라는, 흑인의 입장에서는 획기적인 주장을 한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상당히 권위주의, 보수주의적인 정권이라 백인들도 정치적 자유가 없었고 사회적, 문화적으로는 크게 숨막히는 삶을 살아야 했다.] 법무장관 지미 크루거가 '''"그까짓 검둥이 하나 죽어봐야 그것은 내가 걸린 [[감기]] 이상의 고통도 주지 못한다."'''라는 막말을 함에 따라 투투의 발언은 더욱 부각되었다. 투투는 크루거를 "한 인간의 죽음을 보고 감기 말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크루거를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남자"라고 불렀다. 투투는 한걸음 더 나아가 비코의 장례식에서 '''인간성을 잃어가는 백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촉구하며 그들로 하여금 흑인도 인간임을 알게 하자고 주장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그렇게 투투는 인종차별의 피해자는 흑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그는 남아공의 백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데 주력했다. 이는 남아공 백인들에게도 상당한 반향을 남겼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흑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가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는데 흑인들이 백인 구역에 못가듯이 백인들도 흑인 구역에 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모든 언론과 미디어는 정권의 검열을 받았으며 흑인들을 피에 굶주린 야만인으로 모함하는 온갖 ~~[[찌라시]]~~ 선전물들이 판을 쳤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투투가 연설을 하면서 "흑백 차별이 철폐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유혈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 것입니다"라고 발언하면, TV나 라디오 방송에서는 "유혈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 것입니다"라는 말만 나오는 식이었다. ~~[[간디(문명 시리즈)|간디]]?~~[* 예시라고 들었지만, 이는 드립이 아니라 '''실화'''이다. "유혈 사태"는 백인들이 미디어로 접한 투투의 유일한 육성이었고, 그로 인해 남아공 백인들은 투투를 평화운동가가 아닌 [[히틀러]]나 [[괴벨스]]와 같은 미친 선동가로 착각하곤 했다. ~~사실 아파르트헤이트는 친나치 성향이 강했으니 괴벨스를 예로 드는 건 좀 부적합할지 모르겠지만~~ 연설 중 주먹을 들어올리는 제스처를 담은 씬을 잘라서 앞서 언급한 육성에 합성하는 건 덤.] [[1978년]] 투투는 레소토교구장직을 사임하고 다시 남아공으로 돌아왔다. 그는 7년간 일하며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는 남아프리카 교회 협의회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는데 이무렵 흑인 중산층들은 대대적으로 성장했고 정권의 차별정책에 맞서 격렬히 투쟁하기 시작했다. 그로서 작지만 값진 성과들을 거두기 시작했는데 흑인이 백인 전용 [[공원]]이나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다는 법안이 사라졌으며 흑인과 백인의 시합도 허가되었으며 흑인들이 도시의 [[호텔]]을 이용하는 것도 허락되었다. 새 대통령 [[P. W. 보타]]는 "인종 차별은 영구적인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을 수도 있다."라고 말하는 등 변화의 기미가 보였으나 사실 이것은 포르투갈 독재정권 붕괴와 로디지아 정부 교체, 국제제제로 어려움에 처한 남아공 정부가 대외 이미지 개선을 위한 '''연막작전'''이었다. 보타 정부의 목적은 약간의 빵을 하사하여 흑인 중산층을 만족시키고 해외의 여론을 개선하면서 차별이라는 아파르트헤이트의 핵심 정체성 유지로, 통행법과 집단영역법은 손도 대지 않았으며 이는 흑인 청년층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백인들에겐 효과는 있었는지 일부 연합당 출신 의원(남아프리카 당)들이 국민당에 입당하기도 하고 상당수 자유주의적 백인들의 지지표를 꽤 확보해서 극우파들이 보수당으로 떨어져나간 상황에서도 1987년 총선에서 52.3%라는 득표율을 확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